ㅇ 기고매체/일자: 이코노미조선(2024. 12. 2.)
ㅇ 기고자: 윤덕룡 경기도일자리재단 대표이사
ㅇ 온라인 기사 링크: 끝 모르는 의·정 갈등…‘레알폴리틱’을 생각할 때(윤덕룡 대표이사)
1990년 10월 3일 오전 0시 무렵 독일인은 모두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10월 2일에서 10월 3일로 넘어가는 시각에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는 기념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앞 연단에는 당시 서독과 동독의 마지막 총리 그리고 주요 강대국 지도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독일 국기가 게양되었고 사회자가 현직 서독 총리인 헬무트 콜을 첫 번째 연설자로 소개했다. 콜 총리는 통일 기념식의 첫 연설은 자신이 아니라 ‘통일의 아버지’가 하는 것이 옳다며 야당의 브란트 전 총리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이를 지켜보던 국민과 전 세계의 언론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브란트는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도자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이에 반대하여 독일인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활동했다.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 노르웨이로 망명한 그는 독일 비밀경찰의 추적을 피하려 원래 이름(헤르베르트 프람)을 버리고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전후(戰後)에도 그의 이름이 되었다. 나치 패망 후 독일에 돌아온 그는 사민당(SPD)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사민당을 독일의 주요 정당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브란트는 서독 총리를 역임하면서 동서독 간 냉전 구도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동방 정책을 제시하며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국가와 화해를 추진했고 동독과도 관계 개선에 성공하게 된다. ‘레알폴리틱(Real Politik)’은 그의 정치철학으로 유명해진 개념이다. 이념보다는 현실을 기반으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 방식을 의미한다. 그는 베를린 시장 시절 동서독 간 전쟁을 종식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인식했다. 총리가 됐을 때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동방 정책을 추진해 소련, 폴란드 등과 국경 문제를 해결했고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이 과정에서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대인 게토 방문 중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은 나치 만행에 대한 책임을 진정성 있게 표현한 것으로 세계적 화제가 됐다. 그는 동서 냉전 시대에 평화를 만든공로로 1971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엄혹한 냉전 속에서도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했던 레알폴리틱의 철학이 그의 정치적 공로를 만들었다.
브란트가 총리에서 물러난 후 야당이던 기민당에 정권이 넘어갔지만, 브란트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보수당이던 기민당도 동독, 동구권과 교류를 지속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와 경제협력을 확대했다. 그 결과 동서 냉전이 흔들려 동서독은 마침내 통일을 이뤘다.
의료계와 정부 간 갈등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내세운 의료 개혁은 부족한 의사 수를 늘려 의료 서비스 질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학과 학생의 생각은 다르다. 정부와 의료계 갈등이 계속되면서 국민만 의료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상황이 길어지고 있다. 내년부터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면 정부 목표와 달리 의사 수는 오히려 감소한다. 가장 중요한 목표를 더 빨리 달성하기 위해 일부 목표를 양보하거나 목표 수준을 낮추는 실용적인 차선책을 고려해야 할 시간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현실적 장애를 인정하지 않으면 실행이 어렵다. 레알폴리틱의 힘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할 수 있는 수준까지 하는 데서 나온다.